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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흔하지 않은 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An Uncommon Common Message"
시작합니다!

1. 핵심 메시지 "Five"
- 현대 양자물리학과 영적 지혜는 현실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정보장에서 각자의 의식이 선택하고 투사하는 '영화'와 같다고 말한다.
- 인간의 뇌와 마음은 단순히 현실을 수용하는 관객이 아니라, 믿음, 감정, 생각의 주파수를 통해 상영할 영화를 선택하는 '영사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경험과 사회적 통념, 내면의 두려움이라는 낡은 필름을 무의식적으로 반복 상영하며 스스로를 '영혼의 감옥'에 가둔다.
- 절망의 동굴 속에서 드리는 찬양(신앙적 행위)과 원하는 현실을 이미 이룬 것처럼 느끼는 상상(심상화)은, 서로 다른 언어일 뿐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상영될 '새로운 필름'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동일한 창조행위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의지는 주어진 환경과 싸우는 저항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의 사랑과 같은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상영할 영화를 선택하고, 그 엔딩을 기꺼이 책임지는 '창조자'의 용기에서 발견된다.
2. 인사이트 "Present"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단단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사실은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는 한 편의 영화와 같다면 어떨까? 이는 단순한 공상과학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양자물리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부터 사라진 과학자 야코보 그린버그의 뇌과학 이론, 그리고 수천 년간 이어진 영적 지혜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놀라운 결론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의식'이 현실을 경험하는 수동적 관객이 아니라, 어떤 현실을 상영할지 결정하는 능동적인 '영사기'라는 사실이다.
각각 과학, 자기 계발, 신앙이라는 다른 언어로 이 동일한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린버그 박사는 우주가 모든 정보와 가능성이 잠재된 원본 세계, 즉 '라티스(Lattice)'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뇌는 이 라티스와 상호작용하는 인터페이스라고 주장했다. 신앙의 언어는 이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라고 부른다. 이는 운명이 단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필름 라이브러리처럼 무한한 운명 시나리오가 이미 동시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플레이어인 내가 어떤 시나리오를 선택하여 스크린에 거느냐에 따라 나의 현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우리가 이 강력한 영사기를 무의식적으로, 혹은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 과거의 실패 경험, 타인의 시선이라는 낡고 빛바랜 필름을 매일같이 스크린에 건다. "나는 월 300만 원만 벌면 만족해", "나는 원래 운이 없어", "신앙이 있어도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는 나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야"와 같은 생각들은 스스로를 특정 현실 안에 가두는 주문이 된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갇혔을 때, 진짜 그를 가둔 것은 물리적인 동굴이 아니라 분노와 두려움, 절망감에 빠진 '영혼의 감옥'이었던 것과 같다. 우리는 스스로 투사한 부정적인 영화를 보며 "역시 내 인생은 이렇다니까"라고 재확인하고, 그 믿음은 다시 똑같은 영화를 내일의 스크린에 거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 낡은 영화를 멈추고 새로운 영화를 상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여기에 과학과 영성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창조의 원리가 숨어있다.
해답은 '의식적인 필름 교체 작업',
즉 '선택의 전환'에 있다.
한쪽에서는 이것을 '상상력' 과 '느낌'이라고 말한다. 원하는 미래의 한 장면을 상상하고, 이미 그 운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그 생생한 느낌은 라티스에 새로운 정보를 각인시켜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물질화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나는 500억 건물주가 될 수 있다"고 외치며 이미 된 것처럼 느끼는 행위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것을 '맡김'과 '찬양'이라고 부른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며 나의 뜻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윗은 최악의 절망 속에서 상황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살기 위해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구원'과 '승리'라는 영화를 자신의 영혼에 먼저 상영한 행위였다. 놀랍게도 그의 영혼이 살아나자, 비참했던 아둘람 굴은 위대한 왕국이 시작되는 축복의 장소로 변모했다.
'긍정 확언'과 '찬양', '상상'과 '기도'는 결국 같은 행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둘 다 현재의 물리적 현실에 반응하는 것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세계에 접속해 새로운 현실의 주파수에 나의 의식을 맞추는 '튜닝' 작업이다. 이 창조적 행위의 근간에는 '절대적 신뢰'가 깔려있다. 한쪽은 '우주(혹은 법칙) 내게 좋은 것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고, 다른 한쪽은 '나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치 않는다'는 믿음이다.
결국 우리는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실의 설계자이자 창조자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스크린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영사기 안에 걸린 필름을 확인해야 한다. 내 안의 의식이 어떤 생각과 감정, 믿음을 송출하고 있는가? 나는 두려움과 의심의 주파수로 '실패'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뢰가 감사의 주파수로 '성공'과 '회복'이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가?
우리의 자유의지는 주어진 시나리오의 내용을 뜯어고치며 저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필름 라이브러리 앞에서 어떤 영화를 선택할지에 대한 '선택 자유권'이다. 삶의 불가피한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결말을 신뢰하며 용기 있게 새로운 필름을 거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힘이다. 당신의 의식은 오늘, 어떤 영화를 상영하겠는가?
3. 요약 "Message"
우리의 현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의식이 무한한 가능성의 장보장(라티스, 하나님의 섭리)에서 선택해 투가하는 영화와 같다. 대부분은 두려움과 한계라는 낡은 필름을 무의식적으로 반복 상영하며 스스로를 '영혼의 감옥'에 가둔다. 이 순환을 끊는 힘은, '원하는 현실을 느끼는 상상'이든 '절망 속의 찬양'이든, 보이지 않는 새로운 현실에 의식의 주파수를 맞추는 창조적 선택 행위에서 나온다. 결국 우리는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상영할 영화를 직접 선택하는 현실의 창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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